2011년 04월 13일
역사는 삶의 스승인가 - 코젤렉의 목소리에 답하여
역사는 삶의 스승 - 이 실로 역사적인 토포스가 가지는 함의는 무엇인가? 고전적인 해석에 따르면, 역사라는 무궁무진한 범례의 화수분은 현재의 인간이 미래로의 바람직한 노선을 걷는데 있어 스승으로서의 모범 답안을 제시하며 그것이 역사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이 역할 설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고래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당연하게 긍정되어왔던 이 토포스의 역사적 의미에서의 변이과정을 들추고 근대 아니, 현대를 배경으로 ‘역사’ 라는 개념의 형성과정을 고찰하면서 결국 가속화된 시간축을 기점으로 재구성된 역사의 함의에 대해 돌아보고자 한다.
‘역사는 삶의 스승’ 이라는 토포스에 따라 근대 이전 역사의 영역에 있어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연속성은 과거의 역사, 정확히는 역사상의 동일한 범례들에 의해서 근거로써 보증되며 징후로써 파악되었다. 이는 기독교의 태초의 창조에서부터 구원 내지는 종말에 이르는 일방통행적인 역사 도식은 물론이고 이교도의 세속사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코젤렉에 따르면 이전까지 완만히 진행되고 발전되어 무수한 범례가 교훈으로서 유의미할 수 있을 정도로 동일한 시간축으로써 파악될 수 있었던 역사적 흐름이, 기술적인 생산증가에 힘을 얻은 사회의 급속한 발전과 그에 기대한 바에 따른 낙관적 미래를 상정하게 되어 이전까지의 시간의 흐름이 가속화되어버린 근대를 맞으며 이 토포스는 더 이상의 함의를 갖지 못하게 된다.
이는 근대라는 인류가 이전까지의 시공간과 달리 처음으로 맞닥뜨린 새로운 경험공간에서, 역사의 개념과 그 의의가 범례의 보고에 기댄 교훈적 이야기로서의 역사로부터 개별 사건들의 행위의 결과 · 사건 그 자체를 의미하는 역사로 전이됨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 과거 다양한 범례에 대응하여 복수의 언어적 개념으로 파악되었던 역사, 즉 역사들은 그에 따라 역사 자체로서 서사적 통일성이 부여된 역사라는 대표 단수로 치환된다.
그 역사가 가지는 함의는 이제 단순한 범례의 집합이나, 사건의 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근대의 태동 시점에서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긍정할 수 있는 대표적 개념으로서의 자유, 진보, 정의, 혁명 등의 가치와 동위선상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진보는 역사를 초자연적으로 규정하고 역사가 그 자체로서 유의미함을 명증하는 개념으로서 그에 따라 봉건적 연대기와 천문학적 자료에 기초한 역사적 해석은 거부되었고 역사의 진보를 향한 방향성만이 유의미하게 되었다.
전술한 방향성은 잇따른 혁명의 과정에 기초한 것으로, 그 경험은 역사서술의 조작가능성도 불러왔지만 새로운 역사의 생산 가능성에 대한 긍정과 확신은 과거 역사에 대한 기대를 더 이상 필요치 않을 수 있게 된 이유로 기능하였다.
코젤렉의 역사에 대한 개념사적 접근은 ‘역사는 삶의 스승’ 이라는 토포스에 대해 안티테제의 입장을 고수하며, 그것은 근대라는 가속과 지연의 범주가 교차하며 프랑스혁명으로 대변되는 경험과 이후의 진보에 대한 기대가 맞물리는 자기가속적 시공간에서 역사에 대한 개념의 변천과정을 서술하는 것을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기에 과거로의 회귀를 끊임없이 단축하는 자기가속적 미래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역사와 역사서술, 역사학에 있어 회의적인 의미로 기능하고 있음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전적인 역사와 역사학은 방법론적 측면에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시급성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주의와 역사철학의 한계 역시 이로부터 분명해진다. 역사는 더 이상 인류에게 스승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다.
코젤렉이 파악한 역사의 지평선에서 노회한 과거의 문헌, 범례모음집에 불과할 자료더미는 이미 그 수명을 잃었다. 그것은 이미 흘러간 3차원의 공간에 유착된 골동품에 불과하다. 고정된 공간에 불과한 3차원이 아니라 가속화된 시간이 더해진 4차원적 공간으로 설정되는 근대, 아니 현대의 시간축에서 역사는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생동하는 현재의 흐름 속에서만 유의미하며 헨리 아담스가 말한 바와 같이 마침내 역사의 역할은 행로의 나침반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행동의 반응을 충고하는 조언자에 불과할 뿐이 되었다.
신이라는 절대성의 표상이 비추던 일방통행로의 한계를 깨닫고 중세라는 공간의 출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중생들에게 인간 이성과 그 합리적인 가능성의 발견은 실로 위대한 일이었다. 비록 신과 이성, 절대와 합리가 결국은 이음동의어에 불과했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고 이성이라는 합리적 고속도로가 이전의 그것과 동일한 일방통행로일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 브레이크는 배제된 채 가속되는 액셀페달만이 허락된 노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제 인류는 역사라는 이름의 백미러와 창문을 돌이켜볼 여유를 잃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한다 할지라도.
그것도 역시 역사의 지난한 과정의 일부이며, 인류가 이제껏 밟아온 역사의 방향성에 기댄 성과이기 때문이다. 그 방향성의 이름은 ‘진보’ 이며, 그것은 현재를 아무리 열정적으로 산다고 해도 쉽사리 자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부단한 흐름을, 그 의미를 깨닫는 과정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것이 백미러든 창문이든 앞좌석의 무엇이든 거울을 보는 이유는 단순히 유리를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얼굴, 즉 지금까지 쌓아 올려온 인생 행보를 돌이켜 보고 앞으로의 노선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돌이켜 보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것을 위해 진정 역사를 돌이켜 보는 참된 방법은 단순한 범례의 집합을 현학적인 수사를 동원하여 열거하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지나간 범례 뿐 아니라, 생동하는 역사와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던 개개의 인물들의 사례를 반추하는 것을 통해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동양 역사 서술의 시초이자 전형을 이룬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 세가, 서, 표, 열전으로 구성된다. 이 중 본기와 그 부속 개념이라 할 수 있을 세가, 서, 표는 제왕과 제후들의 연대기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칸트가 말한 바에 따를 때 이는 연대기에 따른 역사에 불과하다. 사기의, 동양적 역사 서술의 정수는 제왕이나 왕조 · 지나간 사실의 나열에 불과한 본기와 그 부속이 아닌 자신이 처한 시대와 상황을 맞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갔던 개개의 거칠고 생동하는 인간 군상들을 담아낸 열전에 있다.
바로 여기에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역사를 만들어내는 살아서 맥동하는 ‘인간’ 의 존재가 있으며 이것을 기록하고 돌이켜보고, 그것을 현재의 삶과 인류의 행보에 적용하는 것이 진정 ‘살아있는 역사’를 대하는 자세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코젤렉의 역사와 역사는 삶의 스승이라는 오래된 토포스에 대한 개념사적 접근과 그 논증과정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며, 그것은 근대라는 현대까지를 지배하는 서양 문명이 이룩한 인류 역사의 특별한 시공간의 성과 안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위대한 성과에 ‘인간’의 존재가 소외되진 않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 나만의 우문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 문명이 역사의 주체로서 파악한 인간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근대와 그 연장선상인 현대의 가속화된 시간축에서 더 이상 역사가 스승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현실을 맞아 현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자세는 살아있는 역사를 찾아가는 부단한 과정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과거의 역사를 골동품이나 유물 대하듯 소중히 하는 자세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진보라는 역사의 방향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에 대처하는 자세로부터 가능하다. 진보만이 역사를 살아있는 역사로 유의미하게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주체는 바로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의 방향성으로서의 진보를 설정한 서양의 역사와, 역사를 만드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중요시한 동양의 史는 통합될 수 있다.
여기에 내가 그리는 역사와 역사의 역할이 존재한다. 이것이 우문에 대한 나의 자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유의미한 현답으로 만드는 것은 상기한 미력하기 그지없는 모순토성이의 언설이 아니다. 앞으로 추구하는 자신의 삶만이 그 답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나의 스승이라 말할 수는 없다. 역사는 앞으로 ‘진정한 자유를 얻은 독립된 주체로서의 나’ 라는 존재가 살아야 할 삶으로써 그것이 살아있는 역사로 증명될 수 있길 바라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끝없는 지평선이다.
# by | 2011/04/13 10:53 | 트랙백 | 덧글(0)





